이금희(1940년 9월 15일 ~ 007년 2월 20일)는 대한민국의 가수였다. 본명은 이대금(李大金)이다. 1959년 미8군 무대에서 처음으로 가수에 데뷔한 그는 이후 1960년대 본격 가수로 활동했다.
출생 그리고 성장
이금희는 독립운동가인 할아버지를 위해 1940년 9월 15일 평안북도 선천에서 목회생활과 사업을 하던 아버지 이덕선과 어머니 임순도 등 3남 3녀 중 5번째로 중국에서 부상했다. 1945년 해방 후 온 가족이 서울로 옮겨 남산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통역으로 일하던 형(이대산)이 살던 대전을 거쳐 부산에 살았을 정도로 어린 시절은 시대의 아픔과 궤를 같이한 유랑의 세월이었다.
부산에 정착한 뒤 부산성지국민학교 4학년에 입학한 뒤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경남여중 2학년 때부터 음악 선생이었던 바리톤 오현명의 레슨을 받으며 성악가의 꿈을 키웠다. 경남여고 시절 학생회 대대장과 합창부장을 지낸 그는 여고 3학년 때 아버지의 위암 수술로 가운이 기울자 서울음대 진학을 포기하는 좌절을 겪었다.
가수가 되기로 결심하다
그러던 중 부산에 온 박단마 그랜드 쇼를 친구들과 몰래 보러 갔다가 스타 가수의 노래에 빠져 인생이 달라졌다. 현인이 노래를 너무 좋아해서 대학을 못 가도 그런 노래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 가수가 되려고 했다. 아버지의 반대는 대단했지만 어머니와 형이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큰오빠의 친구인 인기가수 손민도가 부산에 오자 아버지가 모르는 사이에 짐을 싸서 무작정 상경했다. 손민도의 소개로 KBS 방송악단장인 그의 동생 손민영을 찾아갔다.
가요계 데뷔
즉석 노래 테스트에서 팝송 가사를 상큼하게 불러주는 그녀에게 반한 송민현의 도움으로 1959년 KBS 라디오 버라이어티 쇼 프로그램에 출연, 당시 최고 인기 가수들 틈바구니에 끼어 팝송 번안곡 동문이 떴네를 부르며 돌연 가수가 됐다. 그는 미8군 무대에서 유명했던 베니 김(본명 김영순)의 눈에 들어 뉴스타 쇼에 출연해 미8군 전속가수가 됐다. 폴 앵커와 엘비스 프레슬리의 곡과 신선함 바나나보트송 비파파 룰라 등 외국 번안곡을 불러 인기를 끌었던 미8군 무대, 대학제, 다운타운 클럽에서 주로 외국 번안곡을 불렀던 그는 여성 팝 메신저로 1960년대 초 한명숙 현미와 함께 당대 최고의 여가수로 대접받았다. 1963년 이후 본격적으로 부상해 미스 다이너마이트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댄스 가수 여왕으로 톱가수가 됐다. 키 161cm, 몸무게 50kg인 당시로서는 좋은 체격에 파격적인 댄스 동작에 허스키한 보컬로 세간의 유행을 일으켰다.
‘키다리 미스트 김’ 대히트하다
트위스트 리듬에 맞춰 추는 이금희는 한국 최초의 댄스 가수였다. 특히 남성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그가 대중의 인기를 끌자 박준석을 비롯해 많은 작곡가로부터 앨범 발매를 제안받았다. 어느 날 음악가 황우여가 찾아와 일자리를 제의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래도 황씨가 한 달간 조르자 마지못해 곡을 받고 취입한 게 데뷔곡이 된 키다리 미스터 김이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이금희에게 공연과 방송 출연이 몰리면서 목소리 상태가 최악일 때 불어넣었는데도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그는 생전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런 식으로 불어넣은 노래가 나의 대표곡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 노래는 트위스트 열풍을 일으키며 전쟁의 포화를 이겨내고자 하는 국민에게 용기와 즐거움을 주었다. 한명숙의 노란 셔츠의 사나이, 현미의 밤안개와 함께 신드롬을 일으키며 팬들의 기억에 깊이 각인됐다. 즐겁고 코믹한 가사가 인상적이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키다리 미스터 김의 뒷얘기도 흥미롭다. 작사 작곡한 그는 1966년 노래를 알리기 위해 키 180cm가 넘는 30여 명을 모아 국내 최초의 팬클럽을 결성해 화제가 됐다. 또 이 노래가 1년간 방송금지곡이 된 사연도 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키가 작아 당국에 키다리 미스터 김을 부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금희는 이 노래를 발표한 1966년 이미자 유주영 등과 베트남 비둘기부대 위문공연을 떠났고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악전고투 속에서도 파병 군인들을 열광시킨 그가 베트남 군인들과 트위스트를 추는 파격적인 사진이 외신을 통해 보도돼 화제가 됐다.
1968년 일본 무대에서는 방해를 받기도 했다. 도쿄에서 열린 한일 친선공연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하려다 격렬한 반일시위를 겪은 그가 노래를 부르자 현지 직원이 마이크의 음량을 크게 줄여 고생한 일화가 있다.
그는 또 미8군 가수였던 막내동생 이금미(본명 이대란)와 이씨스터스를 결성, TV방송에 출연해 주목받았다. 미8군 무대 스페셜 A급 가수로 떠오른 그는 스프링 버라이어티 등 유명 쇼에서 월 40회 이상 공연 예약을 받고 신중현과 무대를 꾸몄다. 화려한 춤을 추며 노래한 이금희는 많은 남성의 시선을 받으며 무대마다 앙코르 세례를 받았다. 그는 생전에 “당시 수입도 엄청났지만 복욕이 높아 의상비로 탕진했다”고 회고했다.
이금희가 팝송을 부르면 바로 뜬다는 말이 나오면서 가요계의 핵폭탄으로 떠오르자 그를 질투하는 눈초리로 만들었다. 클래식 창법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그는 비난을 이겨내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며 노래 연습을 했고 허스키 보컬이 됐다.
이금희는 키다리 미스터 김이 수록된 데뷔앨범 발표 후 둘이서 가볍게 돈, 날씬한 딸끼리, 용꿈, 그거 진짜 별꼴이다, 나는 튀어올라, 한복, 두 갈래 길, 작은 새, 다이애나, 정말 슬프다 등 히트곡을 발표해 1위 인기 가수로 등극했다.
결혼 후 가요계를 떠나지만 196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던 그는 가수의 길을 오래 걷지 못했다. 키다리 미스터 김 발표 직전인 1965년 결혼한 그녀는 두 번이나 유산했다. 심한 충격을 받은 그는 세 번째 임신으로 딸(윤정)을 낳았고 1969년 MBC TV 개국쇼 출연을 끝으로 가요계에서 사라졌다. 연예 활동보다 딸을 위해 평범한 어머니의 길을 걷기로 한 것이다. 다만 최희준, 위키리, 한명숙, 현미 등 인기가수들의 친목모임인 60회와 세미회에는 출전해 친분을 쌓았다.
이혼 그리고 컴백
딸의 학교 모임에 전념한 채 애완견을 키우면서 보낸 이금희는 1977년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이후 1984년 호텔 디너쇼에 간간이 모습을 드러냈고 1987년 7월 KBS-1TV 가요무대로 컴백했다. 이후 TV와 라디오 프로그램 출연, 교포 위문공연으로 동포들의 망향 설움을 달랬다. 결혼 후 불어난 몸무게를 줄이고 재기의 의욕을 보인 그는 1987년 교회 성가집을 내고 이듬해 키다리 미스터 김 등 히트곡과 번안곡을 담은 CD앨범 웃기지 마를 냈으며 서울 정동극장에서 한명숙 최양숙 권혜경 등 왕년의 인기가수들과 협연했다. 한국 최초의 팬클럽을 갖고 최고의 댄스곡으로 1960대를 댄스 붐 지대로 몰아넣은 ‘한국 최초의 댄스 가수’ 이금희는 김추자, 김완선, 김현정 등 후배 댄스 가수들의 탄생에 자양분을 제공한 선구자였다.
병 그리고 사망=2005년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받은 뒤 혈압이 높아지면서 뇌출혈로 쓰러져 줄곧 서울 은평구 연세노블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아 왔다. 최근 폐렴이 심해져 호흡곤란과 심장마비로 결국 숨졌다. 향년 66세. 유족으로는 딸 민윤경(38) 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