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정교하고 치밀한 단편소설로 역사소설의 원형을 만들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
연도 제목 원제 비고 1914노년 1914바루타 사루 장 아나토ー루 프랑스 저작 번역서 1914봄의 심장 춘심 윌리엄·버틀러, 예이츠 저작 번역서 1914쿠라 리몽도쟈은테오피루·고티에 저작 번역서 1915.11. 라쇼몬 1916.2. 고비 1916참마 대나무 1916한·수건 수건 1916담배와 악마의 연기 1917희작 3.1.1.17운. 4.17재수물 3.17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일본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 상인 “아쿠타가와 상”는 1920년대에 큰 족적을 남긴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띤 상이다. 아쿠타가와는 약 10년 간작가로 활동하면서 장편은 없었지만, 150편 남짓 한 단편 소설을 쓰는 등 왕성한 창작 의욕을 보였다. “코””라쇼몽”등 자연 주의적인 작품으로 격찬되었지만, 작품 속에는 불행을 체험한 작가 자신의 신경 쇠약적인 면모가 녹아 있다.1892년에 태어난 아쿠타가와는 생후 8개월 만에 어머니가 정신병을 앓고 외삼촌 집에서 자랐다. 선 병질였던 그는 어머니의 광기가 유전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당시 일본 제국 주의가 늘어진 어두운 시대 상황과 사회의 분위기로 염세적 회의 주의에 빠졌었다. 또 성공한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태동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적응하지 못하고 초조감에 휩싸이기도 했다.1914년에 도쿄 제국 대학 재학 시절 첫 작품”노년”을 발표한 이래, 치밀한 구성과 다양한 문체의 작품으로 주목 받아 말기 작품”신기루”과 “톱니 바퀴”는 그의 날카로운 신경을 섬뜩한 정도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35세였던 1927년 오늘,”막연한 불안”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유서를 남긴 채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김·지 석 논설 위원/매일 신문 2012년 07월 24일 h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3145&yy=20121892.3.1-일본의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생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도쿠가와 류노스케, 1892.3.1~1927.7.24]~~~~~~~~~~~~~~~~~~~~~~~~~~~~~~~~~~~~~~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2721B4653140E5E28
1919년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이고, 맨 왼쪽이 기쿠치 히로시이다.
“그냥 막연한 불안. 나는 이 2년간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일본 최고의 신인 문학 상으로 우뚝 선 아쿠타가와 상의 장본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이런 유서를 남기고 1927년 7월 24일 도쿄·다바타의 집에서 음주 자살했다. 향년 35세였다.용 띠, 띠 진시 월진 때 태어났다고 해서 류노스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는 생후 8개월경 어머니가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인 것으로 외삼촌 집에 양자로 가게 된다. 그 뒤 생활은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문예를 사랑하는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란 아쿠타가와는 감수성 예민한 소년으로 자라났다. 그러나 어머니의 광기가 유전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평생 그를 괴롭혔고 결국 그를 자살로 몰아넣은 하나의 원인이 됐다.1910년 제일 고등 학교에 입학하고 도쿄 제국 대학 영문과에 진학했고, 재학 중에 “아키라”을 발표한 것에 나쓰메쏘 세키의 극찬을 받고 화려하게 문단에 등단했다. 1916년에 대학을 졸업하고”라쇼몽”(1915년),”죽”(1916년)을 발표하면서 신진 작가로서 입지를 굳혔다.초기의 그의 작품은 소재를 왕조의 설화에서 찾고 있지만, 그 후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작품의 무대를 넓히고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과 섬세한 서정성을 갖춘 독자적인 소설 세계를 만들어 냈다. 그의 작품은 정교하고 치밀한 구성과 다양한 문체로 바로 대 문단에 확고한 지위를 쌓아 갔다.1921년경부터 건강이 쇠약해진 데다 신경 쇠약 등으로 시달리던 그가 돌아가시기 전의 2년간 느꼈다”막연한 불안”은 개인적인 감정이다만 아니라 당시의 지식인 모두가 공감하던 쇼와 시대에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조선 닷컴 2016-07-24h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00718_00061927.7.24-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자살[역사 속의 인물]신경 쇠약에 시달린 작가 아쿠타가와
내용 일본 도쿄 태생 도쿄 대학 영문과 졸업.도쿄 대학 재학 중에 나쓰메 소세키의 문하에 들어가쿠메 마사오, 기쿠치 히로시(본명은 히로시라고 읽는다)등과 제3차《새 사조)를 발간한 처녀 작《노년》을 발표했다. 이어 『 새 사조 』에 『 여우 』을 『 새 소설 』에 『 죽 』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인정을 받았다. 그 후는 역사 소설로 역설적인 인생관을 표한다며 이지적 작풍을 주로 하였다. 합리주의와 예술 지상 주의 작풍으로 일세를 풍미했지만 말년에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두 등 시대의 동향에 적응하지 못하고 회의와 초조와 불안에 휩싸였고, 마침내 치열한 신경 쇠약에 빠져”막연한 불안”을 이유로 자살하고 말았다.복잡한 가정 사정과 병약한 체질은 그의 생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일찌감치 염세적이고 회의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다. 대표작에는 “라쇼몽”(1915)”어느 바보의 일생””톱니 바퀴””고기”(1927)”서쪽인”등이 있다. 1935년부터 매년 2회(1월·7월)시상되는 아쿠타가와 상은 그를 기념하여 문예 춘추사가 제정한 문학 상이다. /두산 백과(2022.3.1)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년~1927년]일본의 작가. 태어난 뒤 엄마가 발광, 외가에 양자로 가그는 병약하고 신경이 날카로운 그의 일생에 큰 영향을 주고 염세적 회의 주의에 빠뜨렸다. 수재로 학교에 다니면서 도쿄 대학 영문과 재학 중에 새 사조에 관계하고 거기에 올린 『 아이 』(1872)이하목수석의 극찬을 받고 문단에 서서 졸업 후 신문 사원(1918) 제1창작집 『 라쇼몬 』을 발표, 자리를 굳혔다. 그는 일본 및 중국·유럽 등의 옛날 이야기 등에서 소재를 요구하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표현한 것이 많다. 고전적 균형·합리주의·예술 지상 주의에서 자연 주의의 인생관과 퇴폐적 경향에서 탈피했으며 지나친 미문에 치우쳤지만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다. 예술과 생활의 이율배반, 작가로 막연한 불안 등으로 자살./(인명 사전(2022.3.1)아쿠타가와 류노스케(아크타가와 리유우노스케, Akutagawa Ry쓰레기 nosuke)동의어:울타리, 죠코도 히데토 1892.3.1도쿄[동경]~1927.7.24도쿄. 일본의 소설가 초기의 필명은 야나가와 류노스케. 하이쿠 시인으로 호는 가부키 도쿄 쿄우 바시의 이리 후네쵸우에서 니이하라 토시조의 장남으로서 태어났다. 용 띠 년 용 띠 진시 월진 때 태어난 것부터 류노스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생후 8개월경 어머니가 미쳤기 때문에 어머니의 친정 오빠인 아쿠타가와 도장의 양자로 가게 됐다. 어머니의 광기가 유전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평생 그를 괴롭혔고 결국 그를 자살로 몰아넣은 하나의 원인이 됐다.양자로 간 집은 생활은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문예를 사랑하는 분위기의 집안이었다. 덕분에 아쿠타가와는 어려서부터 책과 그림, 골동품에 친숙할 수 있으며 감수성 예민한 소년으로 자라나게 됐다. 1913년 제일 고등 학교를 거쳐서 도쿄 제국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고 1916년 졸업했다. 재학 중에 구메 마사오, 기쿠치 간들과 함께 동인지 『 신초 』(3·4차)을 출판하고 1916년에 동인지에 발표한 단편 소설 『 소설 』이하목수석의 극찬을 받고 화려하게 문단에 등단했다. 『 옛날 』은 『 라쇼몬 라쇼몬 』(1915)·『 죽 』(1916)·『 지옥변 지옥변 』(1918)·『 덤불 숲 속 』(1922)등과 그가 애독한 헤이안 시대 말기의 설화 문학이다 『 권작 이야기 집 』 또는 『 우지 습물어 』에 기초한 것으로 그의 재기 넘치는 재구성을 통한 인생에 대한 회의와 체념을 표현했다. 그의 초기 작품은 무대를 과거로 옮기고 괴이한 사건을 소재로 하는 것이 많았지만 거기에 반드시 근대적·심리적 해석을 가미하고 매우 화려한 수사와 함께 독자를 매료시켰다. 그 밖에도 역사에서 제재를 가한 작품으로 기독교 문학의 문체를 구사한 『 수도자의 죽음 』(1918), 메이지 개화기의 번역체를 구사한 『 개화 살인 개화의 살인 』(1918), 그리고 오시오 요시오, 타키자와 바킨, 마쓰오 바바 아키라 등 에도 시대의 저명한 인물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 심리를 새롭게 해석하려던 『 어느 날 오이시 스케 』(1918). 또 대륙을 무대로 한 『 시기야마네 』(1921)·『 아키야마도 』(1921)등도 독서를 통해서 얻은 소재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그의 재능을 엿보기에 충분한 수작이다.자연 주의 이후 일본 문학이 있는 그대로의 인생의 진실을 묘사한다는 미명 아래 허구 세계의 구축을 도외시하고 왔다. 그러나 아쿠타가와는 그의 자전 소설적인 『대 길잡이 우지 신스케의 반생 』(1925)에서 밝혔듯이”인생을 열자에게 길 가는 통행인은 관찰하지 않았다. 오히려 통행인을 관찰하기 위해서 책 속의 인생을 알려고 한 “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를 사랑했지만 과거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역사를 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입장이었다. 『 재주 사쿠야마 마이 』은 『 하치켄 전팔 검)』의 작자 바킨의 심경을 빌려서 그 자신의 심경을 말한 것으로 목욕탕 안에서 뱀 손 뜨기의 남자가 “바킨은 자연 그대로의 인간을 그릴 수 없다. 손 끝의 잔재주나 어설픈 학문으로 작품을 날조하고 있어”등의 독설을 퍼붓고 있는 것은 바로 자연 주의 이후 문단 통념 아래에서 비평가들이 아쿠타가완 비판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아쿠타가와는 인간의 생생한 모습을 쓰지 못하고 역사에 도피한 것이 아니라 당시 문단의 통념이 추방된 상상력과 꿈을 살리고 장엄한 허구의 세계를 구축하려 했던 것이다.당시, 자연 주의의 주류였던 ” 있는 그대로의 작가의 삶을 묘사한다”나 소설은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대중 앞에 노출시키는 것을 참기 어려운 치욕으로 생각했다. 오히려 자신을 숨기고 세상을 비웃고 샀다고 생각하는 에도 시대의 재주작 작가에 남모르는 선혈을 흘린 진정한 소설가라고 생각했다. 역사 소설 외에 『 귤 』(1919)등 현대 생활에서 취재한 작품도 있지만 자연스러운 문체를 개척하지 못하고 장편은 출판하지 못한 채 단편에 그쳤다. 1923년 이후는 내 소설도 약간 시도했지만 무덤에 묵직하게 내리꽂히는 일단의 흙 같은 인간의 절망적인 운명을 한탄했다 『 한 덩어리의 흙 한 덩어리의 흙 』(1924)외에는 특기할 것은 나오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서서히 죽음을 의식하게 되고, 신변의 여러 사건은 그를 심적으로 괴롭히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고 요양할 지경이니 신경 쇠약에 의한 강박 관념에 시달렸다. 당시 『 점귀 남편 』(1926)는 죽은 육친을 회상하며 자신의 죽음의 그림자를 감지하는 심경을 그리고 『 현각 서재 현 쓰루 산방 』(1927)는 병상의 노인의 심경과 그의 죽음 후에 일어나주변 인물 사이의 파장을 그리고 있다. 『 신기루 』(1927)·『 톱니 차 』(1927)는 병적인 그의 날카로운 신경을 그대로 묘사하고 소름 끼칠 정도이다. 이들 작품은 작가가 자신의 정신 착란 상태를 대중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으로 문단의 절찬을 받았다. 사소설의 대가인 카사이 젱조가<톱니 바퀴>에 대해서”그도 처음 소설을 쓴 “라고 말한 것을 시사하는 바가 크다.마지막 해인 1927년에는 풍자 소설 『 헤엄 』, 기독교에 관한 고찰 『 서쪽의 사람 』, 자전적 소설 『 한 바보의 일생 』 등 많은 작품을 썼다. 7월 24일 도쿄·다바타의 집에서 수면제를 먹고 35세에 자살했다. 유서 『 한 옛 친구를 보내수기 』에는 자살하는 동기를 “막연한 불안”이라고 썼지만, 그것은 육체적·생활적·문학적·사상적 요소가 복합된 불안으로 생각된다. 그는 자연 주의 이후 다이쇼 시대의 작가 중에서 시대의 불안을 가장 명확하게 인식한 지식인으로서 그의 작품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에 깊은 감명을 주는 요소를 지니고 있어 오늘까지 생명력을 가지고 널리 읽히고 있다.사이타마 현문/브리태니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3.1~1927.7.24]아쿠타가와 류노스케[오가와 류노스케], 1892.3.1~1927.7.24]요약 일본의 소설가. 합리주의와 예술 지상 주의를 바탕으로 쓴 작품이 많다. 대표작에는 『 라쇼몬 』(1915)가 있다. 매년 2회(1월·7월), 그를 기념하여 수여하는 아쿠타가와상이 있다.
/ 위키백과 (2022.3.1~~~1927.7.24 – 1927.7.24 – 일본의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자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1892.3.1~1927.7.24] 1927.7.24 – 일본의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자살 오늘의 역사 (7월 24일) [1927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아크타가와 리유우노스케, 1892년 3월 하루~1927년 7월 24일)는 일본의 근대 소설가이다. 호는 징강 당주인 하이쿠 작가로서 호의 아희이다.그의 작품은 대부분 단편 소설이다. “산 죽”,”수풀 속”,”지옥 변상”등, 주로 일본 『 권작 이야기 집 』·『 우지 히데 이야기 』 등 전통적인 고전에서 제재를 가했다. 또”거미줄(원제:거미줄)”,”두 자춘”등 어린이를 위한 작품이나 앞두고 예수를 학대한 유대인이 예수가 세상에 돌아올 때까지 헤매다는 상상력을 발휘했다”방황하는 유대인”도 있다.생애 유년 시절의 1892년(메이지 25년)3월 하루, 도쿄에서 우유 판매업자였던 아버지·인하라 토시 조우와 어머니·복의 사이의 아들로 태어난(아쿠타가와이라는 성은 원래 그의 어머니의 성이었다). 이때에 태어난 시간이 우연히도 띠 진월 용 일진 때였기 때문”용”의 글자를 이름에 넣어 류노스케와 달게 되었다고 전하지만 실제로 그가 태어난 1892년 3월 하루는 간지는 임진년…임 히토시월·임진 날에 해당하고 출생 시각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확실한 적이 없다. 이름도 호적은 “류노스케”이지만, 그가 입양된 아쿠타가와가나 졸업한 학교의 명단 등의 문서에는 “이루 우노스케”이다(아쿠타가와 자신은 “이루 우노스케”표기를 싫어했다).가족 본래 류노스케의 위안이 최초로 크다는 두 누나가 있었지만 맨 위의 누나였다 첫은 류노스케가 태어난 1년 전에 6세로 여의고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정신 장애를 겪은 류노스케를 양육하지 못 했다. 생후 7개월의 류노스케는 도쿄시 여기구 고이즈미 마치에 있던 외 아쿠타가와가에게 맡겨진 뒤 고모·부귀이 양육을 담당했다. 11세 때인 1902년에 어머니가 드디어 죽자 이듬해에 숙부로 도쿄시의 토목 과장을 지낸 아쿠타가와 도장의 양자로 되어, 아쿠타가와 성을 쌓게 된다. 아쿠타가와가는 에도 시대에는 사족으로 대대로 도쿠가와 집안에 모시고 다도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던 다실 중가이자 예술·예능을 애호했던 에도의 문인적 취미가 집안에 남아 있었다.학교 도쿄 부립 제삼 중학교를 졸업할 때는 성적 우수자라는 상장을 받기도 했다, 덕분에 제일 고등 학교는 시험 없이 입학한(1910년부터 일본에서는 중학교 때 성적 우수자에게는 고등 학교 입학 때 시험 없이 입학을 허가하는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제일 고등 학교 일부 을류에 입학한 류노스케의 동기 중에는 기쿠치 미키도 있었다. 2학년이 되고 기숙사에 들어갔지만 기숙사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는데 거기에서 한 방을 쓰던 이가와 야스와는 평생의 친구가 된다.문학 활동 동인 시 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에 도쿄 제국 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이 당시 도쿄 제국 대학 영문학과는 1학년 중 합격자가 몇명밖에 안 나오는 어려운 곳으로 유명했다). 대학 재학 중인 1914년(다이쇼 3년)2월 고교 동창이었던 기쿠치 간·쿠메 마사오들과 함께 동인지 『 새 사조 』( 제3차)을 간행하며, 우선”야나가와 류우노스케”란 필명으로 아나토ー루 프랑스의 “바루타 자라 알”이 에이트의 “봄의 심장”를 번역을 기고한 뒤 10월에 “새 사조”가 폐간될 때까지 그의 초기작”노년”을 잡지에 발표했다.라쇼몬 발표 1915년 10월 『 제국 문학 』에 그의 대표작”라쇼몽”을 본명으로 발표하고, 급우였던 스즈키 미에 키치의 소개로하목수석문하에 들어간다. 1916년에는 제4차 『 새 사조 』(멤버는 제3차와 거의 같은)를 발간하지만 그 창간호에 실린 “갑”은 “문단에 유례없는 작가가 될 것”이라는 나쓰메 소세키의 극찬을 받아 문단 진출 기회를 얻었다. 이 해 대학을 20명 중 위의 성적으로 졸업했는데, 이때 그의 졸업 논문은 “윌리엄·모리스 연구”이었다. 12월에 해군 기관 학교 영어 교관을 맡아 온 아사노 와사브로가 황도 근본이라는 새 종교에 입문하기 때문에 사직했을 때, 쿠로 야나기 카이슈와 이치카와 삼희 등의 영문학자의 추천으로(하목수석의 조언이 있었다고도 한다)아쿠타가와는 아사노의 후임으로 해군 기관 학교의 촉탁 교관(담당은 영어)로 근무했다. 그 중간 중간에 창작에 힘쓰고, 이듬해 5월에는 첫 단편집 『 라쇼몬 』을 간행했다. 그 후에도 단편 작품을 하나씩 발표하고 11월에는 이미 2번째 단편집 『 담배와 악마 』을 발간하고 있다.마이니치 신문 입사 1916년 가을 『 미타 문학 』의 동인으로 절친한 코지마 마사지로 주선으로 게이오 기주쿠 대학 문학부 취업 제의를 받은 이력서도 제출 했지만 불발됐다. 1917년 3월에 해군 기관 학교의 교사직을 물러나고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에 입사(신문에 기고하는 것이 그의 주된 일로 출근 의무는 없다) 하고 본격적인 창작 활동에 전념한다(참고로 스승인 소세키도 10년 전의 1907년에 역시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했다). 1916년부터 1917년까지 아쿠타가와는 가마쿠라의 유이 가하마에서 하숙하고 1918년부터 1919년까지 큰 도시에 거주했다.결혼1919년 3월 12일에 친구의 야마모토 키요시의 조카(언니의 딸)였다 츠카모토 아야와 결혼하고 이듬해 3월 30일에 장남 히로시가 태어났다. 1921년 2월에 요코즈카해 해군 대학교를 퇴직하고 기쿠치 히로시와 함께 오사카 매일 손님 외 직원으로 본래 거주하던 가마쿠라에서 도쿄 부 북쪽 도시마 군 타키노 가와 마을로 돌아오자. 그 해 5월에는 키쿠치와 함께 나가사키를 여행하고 친구의 화가 콘도 코오 이치로부터 극작가 나가미 토쿠타 로우를 소개 받았다.질병 또한 이 나이에 해외 특파원으로 중화 민국을 방문하고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는 후진타오를 만나고 검열의 문제에 대해서 토론하기도 했다. 7월에 귀국한 그는 “상하이 유기”등의 기행문을 썼다. 1922년(타이쇼 11년)11월 8일에 차남 타카시가 태어났다. 그러나 중화 민국을 방문한 1921년 이후, 아쿠타가와는 신경 쇠약, 장 카타르 등의 병을 얻는 등 점점 심신이 불안하고 1923년(타이쇼 12년)에 유가와라 정에 온천 치료에 나섰다. 작품 수도 줄어들어 이른바”야스 키치 것”등의 사소설적 경향의 작품이 나타나지만 이 흐름은 만년작”톱니 차””고기”등에 연결(이 해 일본을 강타한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주동 세력인 자경단의 단원으로 활약했다는 얘기도 있다).문화 학원 문학부 강사 1925년경에 아쿠타가와는 문화 학원 문학부 강사에 취임했으나, 1926년부터 위 궤양에 신경 쇠약과 불면증이 다시 심해지면 유가와라에서 요양해야 했다. 한편 아내의 글도 동생인 츠카모토 야시마와 함께 요양 차 쿠게누마에 있던 집 소유의 별장에 이주했다. 2월 22일 류노스케도 쿠게누마의 여관 정자에 머물며 거기에 처자를 끈다. 7월 12일에 남 야스시가 생기고, 20일에는 아즈마야의 구분 장”고-4호”를 빌려서 아내와 태어난 아들 아스 시와 산(여름 방학이 되고부터는 히로시와 타카시도 불렀던). 그 사이에 “집을 빌린 뒤”,”쿠게누마 잡기”더”점귀 부호”등의 작품을 탈고하고 또 쿠게누마 개업의 등륭의 병원에 통원 치료를 다녔다. 9월 20일 류노스케 일가는 “고-4호”서쪽에 있던 “시산의 이층집”을 연말까지 빌리다. 여기서 쿠게누마를 무대로 한”유유 미소”를 탈고한다. 이는 관동 대지진 앞에는 키시다루 우세가 살고 있으며 지진 후 재건된 시인의 크니 키다 토라오가 임대한 구분 장을 돌아봤을 때의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류노스케 일가가 크게 느마에 정착하려는 의도가 있다고도 생각된다. 또 이곳에 머물면서 사이토 오모 키치, 쓰치야 분메이, 츠네 토 강, 가와바타 야스나리, 키쿠치 미키 등이 찾기도 했다. 연호가 쇼와에 바뀐 뒤 류노스케는 “고-4호”로 돌아갔다. 조카이자 문예 평론가였다 쿠즈 마키 요시토시와 가마쿠라에서 섣달 그믐날을 밝히고 처자가 있던 다바타에 돌아가지만 쿠게누마에서 살던 집은 4월까지 월세를 얻어 놓고 가끔 찾고 있다.문예 평론 1927년 1월, 매형의 니시카와 유타카가 방화와 보험 사기 혐의로 철도에 투신한 때문, 아쿠타가와는 니시카와가 남긴 빚과 가족을 맡아야 했다. 4월부터 “문학적인 문예적이다”라는 문예 평론에서 “이야기의 재미”을 주장하고 다니자키 준이치로에게 대항하고”이야기의 재미”이 소설의 질을 결정할 수가 없다고 반박하면서 훗날 패전 후 일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비판적인 문단의 메인 스트림을 예견한 일본 문학 사상 유명한 논쟁을 벌인다. 여기에서 아쿠타가와는 “이야기 다운 이야기가 없다”순수 소설의 명수로 시가 나오야를 칭찬했다.자살 1927년 4월 7일 아내의 동창생으로 아쿠타가와 자신의 비서였다 히라마츠 아사 소자와 제국 호텔에서 함께 자살을 약속했으나 여성이 변심하는 바람에 실패했다.7월 24일 새벽”속·서쪽의 사람”을 쓴 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사이토 시게키 오사무에게 받은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막연한 불안”이 그가 밝힌 자살의 이유였다. 그의 계명은 의문원 류노스케 일숭 거사. 묘소는 현재의 도쿄도 토시 마구 스가모에 있는 지겐지이다. 그가 숨진 지 8년 후의 1935년 친구인 문예 춘추사 사주한 기쿠치 히로시로 그의 이름을 딴 아쿠타가와 상이 제정되었다. 이 상은 현재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 상에서 신인 작가 등용문이다.작품의 특징 아쿠타가와의 초기 작품에서는 서양의 문학을 번역한 것도 존재한다(“버선”등)영어과 출신의 특성으로 번역 문학 특유의 논리적으로 정리된 간결하고 공정한 영국 문학적 필치가 특징이다. 작가의 평생 경험이 많이 나타나고 화자와 자신을 분리하지 않은 바람의 작품이 많다.그는 주로 단편 소설을 쓰고 오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걸작으로 알려진 작품도 거의 단편 소설이다. 반면 장편은 그리 많지 않고 있다(미완성 소설로 “네 종문”이나 “노상”가 있다). 또 생활과 예술은 서로 반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연 주의식 자기 고백에 대해서 알몸을 남 앞에 내는 그런 것이라고 멀리하고 진실의 자신은 허구의 세계에서나 분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삶과 예술을 분리한다는 이상에서 작품을 집필했다고 한다. 다른 작가보다 표현이나 시각이 생생하다. 만년은 시가 나오야의 “이야기 다운 이야기가 없다”겠다는 심경 소설을 긍정하고 스토리성이 있었던 자신의 문학을 완전히 부정했다(그 때의 작품이 “신기루”이다).초기와 중기, 후기로 작품의 시기를 나누고 각 시기별 특성이 두드러진다. 대부분의 초기 작품이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중기 이후는 아동용 작품의 집필이 늘면서 폭넓은 장르의 작품을 그렸다. 후기 특히 만년에는 사람의 생사에 대해서 다룬 작품이 늘면서 자살 직전에 어떻게 죽음을 마주 하고 집필했는지 알 수 있다.”모리 자춘”(본래의 이야기는 태평 광기에 실린 당대의 소설 『 두 자춘전 』)등 고전을 참조한 것과 스즈키 미에 키치가 창간한 『 붉은 새 』에 발표한 듯한 동화적인 작품도 많다. 일반적으로는 기독교물과 헤이안 시대를 무대로 한 왕조물로 분류된다. 또 고전(설화 문학)부터 구상을 얻은 작품이 많지만,”라쇼몽”이나 “호랑이”등은 “권작 이야기 집”을 “모모타로”,”지옥 변상”등은 “우지 히데 이야기”에서 제재를 받았다. 또 약속 리듬의 제작과 한문에도 뛰어났다.좌익 반군부적인 자기 주장을 펴고 실제로 그런 작품도 다수 발표했으며 군인의 계급 투쟁을 “유치원생의 장난 같다”와 자신의 저서에서 혹평했지만 당시는 군부에서 저작물에 대한 검열을 시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검열 때문에 정정되거나 추가 기록, 삭제를 면치 못한 부분도 많다. 한편 해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호의를 품은 듯, 육군 유년 학교 교관이었던 도요시마 요시오에게 ” 좋은 일자리가 있다”와 해군 기관 학교에 초빙하다, 풍도가 프랑스어 촉탁 교관으로 근무하게도 주선했다. 우치다 히앗켄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추천으로 해군 독일어 촉탁 교관으로 후에 우치다는 1934년(쇼와 9년)에 쓴 “죽장기”에서 아쿠타가와가 자신의 강사 자리 알선 및 협상에 어느 정도 역할을 했던 것을 담고 있다.작중으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등장시킬 때는 별명”오히나타 타카시”을 이용했지만 이는 “아마테라스”라는 호칭이 당시 천황가의 선조 신이기도 했다 아마 테루를 그대로 글 속에 등장한다, 불경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었으니, 태양신, 그것도 자연 신의 성격을 가진 신으로 “오히나타 타카시”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담배를 너무 좋아해서 하루 180개씩 피웠다는 『 바다 주변 』, 『 교토 일기 』, 『검악산책 』도 시키시마 종목의 담배가 등장한다.관동 대지진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당시 조선인을 학살한 자경단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무자비한 학살의 첫날 밤 이후 그 경험이 너무 잔인하면서 공포였기 때문에 자경단 활동을 그만두었다고 한다.주요 작품*(라쇼몽》(라쇼몬)-1915*(코》(코)-1916*〈 참마죽 〉(죽)-1916*(지옥변》(지옥변)-1918*(무도회》(무도회)*(덤불 속》(수풀 속)*(갓파》(고기)-1927.《하구루마/톱니바퀴》(기어)-1927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