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우 감독이 오랜만에 로맨스 영화로 돌아왔다. <은교>로 데뷔한 김고은과 7년 만의 재회. 게다가 최근 <봄밤>의 인기에 힘입어 ‘로맨스 장인’이라는 수식까지 얻은 정해인의 출연으로 이미 화제가 된 <유열의 음악앨범>. 압도적인 예매율 소식에 기쁨 반, 긴장 반으로 기다리고 있는 정지우 감독의 대표작 4편을 택했다.
해피엔딩
정지우의 서정적인 근작을 기억한다면 그의 첫 장편영화 ‘해피엔딩’이 센세이션으로 다가갈 수 있다. 적나라한 정사 장면으로 막을 올린 <해피엔딩>은 다소 통속적인 치정 서사로 나아간다. 보라(전도연)는 남편 민기(최민식)와 아이를 키우며 살지만 과거 연인 일범(주진모)과의 은밀한 외도에 빠져 있다. 민기와의 결혼 생활이 권태감에도 불구하고 점점 깊어지는 일범과의 고리를 끊으려는 보라. 그러나 일범은 그럴 수 없다. 한편, 두 사람의 바람을 눈치챈 남편 민기는 말할 수 없는 배신에 휩싸여 괴로워한다.
〈해피엔드〉는 욕망의 덫에 걸린 세 남녀가 각각 엇갈린 상황 정리를 꿈꾸며 비극의 결말로 치닫는다. 포털 장르 구분이 ‘멜로’가 아닌 ‘스릴러’에 속한 이유는 그래서다. 통속 멜로라는 비난도 받았지만 해피엔딩을 지지했던 이들은 전통적인 남성상과 여성상을 뒤집은 관계 설정과 현실감을 높인 전도연의 연기력을 높이 샀다. 제53회 칸 국제 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대되었다.사랑니
사랑니는 정지우의 숨은 대표작으로 자주 회자되는 작품이다. 이 영화가 그리는 로맨스는 대체로 서정적이면서도 은근히 전개된다. 하지만 주인공 남녀의 관계 설정이 다소 곤란할 수도 있다. 학원 수학강사인 인영(김정은)이 첫사랑의 이름과 외모까지 빼닮은 17세 제자인 이석(이태성)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나이 서른에 다시 첫사랑에 빠지는 <사랑니>를 미화된 금기 스토리로 읽을 수도 있지만 적지 않은 관객들이 ‘서른 살 여성의 성장 영화’라는 점에서 지지를 보냈다.
인영의 오랜 친구 정우(김영재)는 그 학생이 첫사랑 이석을 닮지 않았다. 말하고 실제 첫사랑 이석과 다시 만난 인영은 두 사람이 전혀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제는 닮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전제가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여기에 현재와 과거가 섞여 무엇이 진짜인지를 구별하기 어려운 애매한 장면이 침입한다. 주체적으로 사랑을 결정해 나가는 남녀의 도발적인 대사가 인기를 끌었다.은교
2012년 그해 신인 김고은은 인상적인 등장을 했다. 소설가 박범신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정지우의 <은교> 역시 세간의 발상을 뒤집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이야기다. 극중 노시인 이적여의 대사 “당신들의 젊음이 당신들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은교>를 가장 잘 담고 있는 문구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시인 이적여(박혜일)는 70세 노인. 그의 집에 어느 날 나타난 여고생 은교(김고은)의 젊음과 활기에 이적여는 매료되고 만다.
자극적인 포스터 문구로 예상할 수 있는 파격은 이 영화에 별로 없다. 은교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이적여의 절제된 단상이 내레이션으로 서술되고, 그의 눈에 비친 은교의 육체가 태양과 맞닿아 한층 싱그럽게 담긴다. 이적여 역을 맡은 배우 박해일이 특수 메이크업을 거쳐 70대 노인 연기를 했다. 바로 여기서 오는 이질감이 영화에 몰입하기 어려운 지점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사회적 거리두기 효과를 내 보기 쉬웠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다. 그럼에도 ‘은교’ 그 자체였던 마간 얼굴의 신예 김고은의 발견만은 부인하기 어렵다.4위
1위도 2위도 아닌 ‘4위’가 타이틀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유를 불문하고 애정이 솟는다. 실제로 국가인권위원회 기획으로 제작된 영화 4위는 1위만 강요하는 대한민국 사회를 꼬집는 말년 4위 초등학생 수영선수 준호(유재상) 얘기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현실은 실제 체육계에 만연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준호의 어머니(이한나)는 아들이 맞더라도 1등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수영코치 광수(박해준)는 때리는 스승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이라는 오래된 관습을 따르는 사람. 정작 준호는 그저 좋아하기 때문에 하는 수영이라는 사실이 더욱 가슴 아프게 한다.
영화 4위를 풍요롭게 하는 것은 체벌하는 스승 광수의 과거사다. 영화 전반부에 제시된 광수의 선수 시절 이야기는 한국 신기록을 노릴 정도로 뛰어났던 유망주인 그가 체벌을 견디지 못해 지금 동네 수영강사를 전전하게 됐다는 것이다. 자신의 꿈을 꺾은 폭력이라는 악습 말년 4위 준호를 만나 같은 폭력을 승계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 자신도 모를 리 없다. 희생자가 다시 희생자를 양산하는 아픈 진실을 조명한 영화 <4위>.다면적인 캐릭터를 탁월한 연기력으로 소화하는 배우 박해준은 <4위> 이후 정지우 감독의 <침묵>, <유열의 음악앨범>에도 참여했다.씨네21www.cine21.com 문장 심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