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현미가 동갑내기 남자친구에 대해 언급했어요. 지난 12일 방송된 KBS2 예능프로그램 ‘불후의 명곡’에서는 가수 현미, 정훈희, 임희숙, 이자영, 최진희가 출연해 ‘전설의 디바’ 특집을 장식했는데요.
이날 방송에서 현미는 절친 한명숙의 ‘노란 셔츠 남자’를 선곡했다. 일부러 이 곡을 선택했다고 밝힌 현미는 “저와 한명숙 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한명숙 씨가 지금 많이 아프다.
병원에 입원한 지 오래지만 상황이 좀 어렵다. 한명숙 씨의 노래를 불러 힘을 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무대가 끝나자 MC 신동엽은 “예전에 저와 방송도 많이 했고 그래서 저는 항상 에너지 넘치는 모습만 기억했는데 이렇게 보니 나이가 어느덧 86세였다”고 그의 변함없는 에너지에 감탄했습니다.
본명 김명선(金明善)
출생 1937년 1월 28일(85세) 평안남도 강동군 고천면 맥전리
국적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학력덕성여자대학교(가정학과/명예학사)
혈액형 O형
가족 슬하 2남 둘째 며느리 원준희
조카의 사연 한상진
종교개신교(그리스도의 교회)
데뷔 1957년 미8군 번안곡 ODanny Boy 가수 현미 연하의 남자친구 열애 신동엽은 이어 우리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밝혀진 것은 최근이다. 동갑내기 연하 남성과 8년째 연애 중인 사실을 밝혀 큰 화제가 됐다. 예전부터 후배들은 많이 알고 있었다며 현미의 동갑내기 남자친구를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이를 들은 정훈희는 “언니 못 말린다”고 말했고, 현미는 “내가 35년간 연예계에서 예쁘게 살지 않았나. 저는 자부한다고 해명했습니다. 신동엽은 그럼요.모든 분들이 얼마나 축하하고 계세요”라고 전했고, 현미는 “스캔들 하나 없이 살아왔는데 저도 인간이라 가끔 외로워지면 밥도 같이 먹고 하는 것”이라고 열애를 시작한 계기를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신동엽은 “동갑 연하는 축복”이라고 말해 웃음을 선사했다.
가수 현미프로필 현미의 본명은 김명선이고 고향은 평안남도 강동군으로 어렸을 때는 평양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1937년 1월 28일생으로 현미의 나이는 만 85세입니다. 현미의 학력은 덕성여자대학교 가정학과 명예학사입니다.
현미의 가족은 두 아들이 있고 둘째 며느리는 가수 원준희입니다. 조카로는 노사연과 한상진이 있습니다. 현미의 형제는 8남매 중 셋째이고 노사연은 언니의 딸이고 한상진은 일곱째 여동생의 아들입니다.
현미는 1.4 후퇴 때 부모와 6남매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당시 평양의 집이 부서져 조부모의 집에 두 여동생이 맡겨져 대피하지 못하고 북쪽에 남았다고 합니다. 종전 직후 두 여동생은 점보 밑에서 자랐으며 2000년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 친형과 함께 중국 주변에서 만나기도 했습니다.
한편 현미는 친척이나 지인에게 사기를 당하거나 돈을 빌려주지 못해 안타까운 사연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가수 현미 데뷔와 활동 현미는 1957년 미8군 위문공연 무대 ‘칼춤 무용가’이자 방송을 펑크낸 여가수 대신 무대에 올라 가수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다시 드물게 여대생 가수로 현 시스터즈라는 그룹으로 활동했고, 당시 현미를 주목하던 작곡가 이봉조가 현미에게 ‘아 목동아’라는 팝송 번안곡으로 앨범을 만들면서 현미는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당시 곡을 녹음하던 현미의 성량이 워낙 커 다른 가수들과 달리 몇 발짝 떨어져 곡을 녹음했다는 일화는 꽤 유명했습니다. 대표곡으로는 ‘밤안개’,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잠자코’, ‘무턱대고 좋았어요’, ‘내 걱정 말아요’ 등이 있습니다.
가수 현미의 결혼부 이봉조, 그리고 아들
현미는 작곡가 이봉조와 연인 관계로 유명했어요.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파국을 맞아 사실혼이었던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현미는 이봉조와 만났을 당시 이봉조에게 본처와 자녀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임신 후 결혼까지 약속한 뒤에 본처가 찾아와 알게 됐다고 합니다.
현미는 실제로 결혼을 약속하고 시댁에도 찾아갔지만 시어머니가 현미를 예쁘게 봐주셨고 가족 모두가 현미를 좋아해 주셨다며 이봉조는 이혼 서류까지 보여주며 현미를 안심시키고 집안일을 했지만, 이봉조는 두 집 살림을 해오면서 사실을 알게 된 현미는 관례를 정리하자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봉조가 함께 죽으려고 쫓아왔고 아이들과 함께 도망친 현미는 엄앵란의 집으로 피했고, 이봉조는 그곳까지 쫓아와 신성일과 다툼이 있었다며 현미가 관계를 정리하고 본처로 돌아갈 것을 요구해 수년간 왕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인연이 없는 줄 알았는데, 시누이가 이봉조 사망 직전 건강이 악화돼 꼭 한 번만 찾아가보라는 연락을 받고 현미가 이봉조를 찾아왔지만 상당히 심각한 상태였고, 본처와의 재결합을 거부하고 틀니를 단 상태에서 색소폰을 부는 모습에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서로 오열했다고 합니다. 다시 재결합을 약속하였으나 재결합 직전 돌연사로 이봉조가 1987년 8월 31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생전에 이봉조는 본처와의 합장을 원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본처의 자녀들과 현미의 배려로 합장하였다고 합니다.
현미와 이봉조와 사실혼 관계로 얻은 아들들은 이봉조의 호적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첫째 아들은 건희라는 예명으로 ‘첫사랑’, ‘미운정 고은정’ 등을 발표하기도 했고 현미 데뷔 50주년 기념 공연으로 데뷔 무대를 갖기도 했습니다.